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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무장군 대마도정벌 기념비

 

 

 

1419년 오늘은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한 날이다.

역사적으로 대마도 정벌은 3차례에 걸쳐서 일어났다. 이중 이종무의 대마도의 정벌은 제3차 대마도 정벌로,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라고도 부르며, 당시 대마도에서는 '누카다케 전쟁'이라고 하였다.

 

이종무의 3차 대마도 정벌은 당시 왕이었던 세종이 아니라, 상왕이었지만 군사에 관한 결정을 직접하던 태종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정벌군은 1419년 6월 삼군도체찰사(정벌군총사령관) 이종무 지휘아래 함선 227척과 병력 1만7천285명으로 정벌군을 편성했다. 거제도 남단 주원방포에서 10척의 정찰선단을 앞세우고 출발한 정벌군은 3일만에 대마도 천모만 전방 해상에 당도했다.

 

정벌군은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고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는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한다. 대마도에 하륙한 지 13일만이었다. 정벌군의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결국, 대마도 도주는 항복을 전했고,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태종은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받은후,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고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정벌군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어 조선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는 통치권속에 예속되었다.

 

 

 

 

▲ 해동지도 중 대마도(우측하단)

 

 

 

대마도 정벌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대부분 여기까지겠지. 우리는 세세한 내용까지야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매우 성공적이고 일방적인 무력의 행사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대마도 정벌은 여러면에서 성공적인 부분도 있었다. 대마도 도주는 항복의 댓가로 통상의 권한을 받음으로써 조선과 대마도는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고,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군사전략 측면에서는 제3차 대마도 정벌은 아쉬움이 많은 전쟁이다. 이 원정에서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사실 대마도에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했을 때에 지휘관들의 전술지식 부족과 상륙전 경험부족으로 100여명의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졸전을 치룬결과이다.

하지만, 진정 아쉽고 아쉬운 일은 당시의 위정자들이 대마도의 전략적 가치와 잠재적 경제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대마도주에게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우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마도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체제를 마련했더라면 훗날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로 남았을뿐만 아니라 일본의 본토를 감시하는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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