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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시(알렉셰프스크)

 

 

95년 전 오늘,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는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자유시 참변은 표면적으로는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은 내부적으로는 독립군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사실상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자유시 참변은 복잡한 국제정세와 무장독립군 새력 내부의 실타래 처럼 얽힌 이해관계에서 촉발된 사건이다. 정확한 자료도 남아있지 않고, 사건을 보는 시각도 다양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자유시 참변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러시아 적군은 일제에게 캄차카만 연안 일대의 어업권을 받는 대가로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때 우군이었던 독립군세력을 배신했고, 자유대대와 이항군으로 대표되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은 독립군의 통수권을 놓고 같은 독립군끼리 총부리를 들이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 간도참변시 독립군과 양민들 시신

 

 

애시당초 흩어져있던 독립군이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해서 자유시로 모인것도 간도참변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며, 러시아 적군에게 캄차카만 연안 일대의 어업권을 대가로 한인 무장독립군 세력의 분열을 획책한것도 일제였다.

내부분열의 아픔은 그 어떤 아픔보다 더하지만, 자유시 참변을 단순히 독립군 세력간의 어의없는 알력싸움으로 치부해서 부끄러워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제대로 알고, 부끄러워하고, 반성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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